
조선 왕조 500년 역사에서 묘호를 받지 못한 두 임금 중 한 명인 광해군은 오늘날까지도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입니다. 임진왜란의 혼란 속에서 세자로 책봉되어 분조를 이끌며 나라를 지켰고, 즉위 후에는 실용적인 중립 외교로 국익을 지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폐모살제라는 유교 윤리 위반으로 인조반정에 의해 폐위되었습니다. 과연 광해군은 폭군이었을까요, 아니면 시대를 앞서간 개혁군주였을까요? 그의 삶을 통해 조선시대 왕권과 명분의 충돌을 살펴봅니다.
임진왜란 속 세자 책봉과 분조 활동
광해군은 1575년 선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후궁 공빈 김 씨였으며, 그녀는 광해군을 낳은 지 삼 년 만에 출산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부재는 광해군에게 깊은 그리움으로 남았고, 이는 지극한 효심으로 발전했습니다. 이러한 효심은 훗날 그가 세자로 책봉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는 불임이었고 대군 탄생 가망이 없었습니다. 신하들은 '군' 중에서 세자를 정하자고 건의했지만 선조는 이를 미루어왔습니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습니다. 전란이라는 위기 속에서 종묘사직의 미래와 민심 수습을 위해 왕세자 책봉이 불가피했던 것입니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선조가 여러 왕자에게 "반찬 중에서 무엇이 으뜸이냐?"라고 물었을 때, 광해군은 "소금입니다. 소금이 아니면 온갖 맛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또한 "무엇이 부족한가?"라는 질문에 "모친이 일찍 돌아가신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합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선조는 이 대답을 기특하게 여겼고, 광해군은 만 하루도 되지 않는 빈약한 논의 과정과 몇몇 신하들의 동의만으로 세자가 되었습니다.
세자가 된 광해군은 분조를 이끌고 평안도, 강원도, 함경도 등지를 오가며 8도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독려했습니다. 조정이 여전히 굳건히 존재한다는 점을 분명히 함으로써 국왕의 몽진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규합했습니다. 요동 망명을 고집하던 선조와 달리 광해군은 전쟁터를 뛰어다니며 전공을 세웠습니다.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당시 광해군의 나이와 상황을 고려할 때 얼마나 무섭고 도망가고 싶었을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라를 구하겠다는 신념으로 승리를 이끌었고, 이는 그가 단순히 혈통만으로 세자가 된 것이 아니라 실질적 능력을 갖춘 인물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즉위 후 개혁정책과 중립외교 노선
1608년 광해군은 34세의 나이로 조선의 15대 임금에 올랐습니다. 즉위 초 그는 당쟁의 폐해를 알고 이를 억제하려 애썼습니다. 남인인 이원익을 영의정에 올리고 이항복과 이항덕에게 비변사를 맡겨 국방 업무를 총괄하도록 하여 군력을 쥐고 있던 대북파와의 균형을 잡아주었습니다. 정국은 안정되었고 국가 기반을 회복하고 민생을 안정시킬 정책들이 시행되었습니다.
'널리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법'이라 불린 대동법이 경기도 지역에서 시행되어 백성들은 과도한 공물 납부의 부담을 덜 수 있었습니다. 최고의 의서인 '동의보감'을 간행하여 백성들이 더 이상 비싼 중국산 약재가 아닌 조선의 약재로 병을 치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간행하여 전란 동안 의롭게 죽은 이들을 국가가 포상하고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1609년에는 일본과 수교를 단행했습니다. 광해군은 수교의 전제 조건으로 국서를 일본이 정식으로 먼저 보내올 것과 임진왜란 중 성종, 정현왕후, 중종의 무덤을 훼손한 범인들을 인도해 줄 것을 제시했고, 일본이 이를 충실히 이행하자 수교를 결정했습니다.
광해군의 가장 뛰어난 업적은 중립 외교였습니다. 1619년 후금의 누르하치가 심양 지방을 공격하자 명나라가 '재조지은'의 명분을 앞세워 원군을 요청했습니다.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내 구원해 준 명의 은혜에 보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광해군은 강홍립을 도원수로 1만의 군대를 파견했으나, 강홍립이 출병은 불가피한 것이었다는 광해군의 밀지를 전달하며 투항함으로써 후금과의 갈등을 피해 가는 중립 외교를 펼쳤습니다.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이는 매우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었습니다. 오늘날 "가만히 있으면 반이라도 간다"는 말처럼 중립은 때로 양측을 적으로 만들 수 있지만, 당시 조선의 국력으로는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는 것이 피해를 최소화하고 더 큰 전쟁을 막는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폐모살제와 인조반정의 비극
그러나 광해군의 치세는 비극으로 끝났습니다. 왕권 강화에 집착한 나머지 궁궐 짓기에 몰두하여 경제를 파탄 냈고, 이이첨과 상궁 김개시 등 측근들의 권력 남용으로 정적 숙청을 위한 무수한 옥사들이 발생했습니다. 친형인 임해군을 교동으로 유배하여 죽이고, 계축옥사가 발생하자 역모를 꾀했다는 혐의로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을 사사했습니다. 그리고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유배하였다가 방 안에 가두고 장작불을 지펴 죽게 했으며, 결국에는 인목대비를 폐비시켜 서궁에 유폐시켰습니다.
이러한 폐모살제는 유학의 기본 윤리인 형제간의 우애나 부모에 대한 효를 저버린 것으로, 광해군이 책임을 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그의 어린 시절 효심과 대비되는 이러한 행동은 권력이 한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여주는 비극적 사례입니다. 힘들게 왕위에 올라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왕권에 대한 집착이 오히려 그를 폭군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1623년 3월 서인 일파의 주도로 인조반정이라는 무력 쿠데타에 의해 광해군 정권은 전복되었습니다. 인조반정의 명분은 첫째 폐모살제, 둘째 궁궐 건설을 비롯한 수많은 토목공사로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다는 것, 셋째 명에 대한 사대를 소홀히 하고 후금과 밀통하여 명을 배신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세 번째 명분은 아이러니한 부분입니다. 오늘날 관점에서는 가장 합리적이었던 중립 외교가 당시에는 역모의 명분이 되었던 것입니다.
왕에서 쫓겨난 광해군은 죽임을 당하지 않고 19년을 더 살다가 1641년 7월 1일 67세의 나이로 제주도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그가 남긴 시 "궂은 비바람이 성 머리에 불고 / 습하고 역한 공기 백 척 누각에 가득한데 / 창해의 파도 속에 날은 이미 어스름 / 푸른 산 근심 어린 기운이 맑은 가을을 둘러싸네"는 고국 한양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습니다. 전쟁 영웅에서 개혁군주를, 그리고 폐위된 왕으로 살아야 했던 그의 삶은 조선시대 왕권의 한계와 명분 정치의 모순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광해군의 삶은 능력과 혈통, 실용과 명분 사이의 갈등을 보여줍니다. 임진왜란 속에서 나라를 구하고 전후 복구에 힘쓴 그의 노력은 인정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왕권 강화를 위한 폐모살제는 정당화될 수 없는 과오였습니다. 결국 광해군은 연산군과 함께 '조'나 '종'으로 끝나는 묘호를 받지 못한 두 임금 중 한 명으로 역사에 남았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권력이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그리고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균형을 잃으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교훈입니다.
[출처]
영상 제목/채널명: https://blog.naver.com/danikim/223325753519